탐욕의 덫: 흙에서 피어난 악몽
어느 날 밤, 저는 이상한 꿈을 꿨습니다. 손바닥 위에 놓인 흙 한줌이 꿈틀거리더니 순식간에 징그러운 구더기로 변하는 꿈이었죠. 꿈에서 깬 후에도 그 불쾌한 감촉과 형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단순한 악몽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강렬하고 생생했습니다. 어쩌면 제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욕망과 불안이 꿈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건지도 모릅니다. 이 블로그를 통해 ‘흙 한줌을 펴보니까 구더기로 변하는 꿈’이 의미하는 바를 함께 탐구하고, 우리 안의 욕망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고민해보려 합니다.
손 안의 흙, 욕망의 무게를 느끼다
어린 시절, 흙은 제게 단순한 놀이터였습니다. 맨발로 흙을 밟고, 흙을 뭉쳐 집을 짓고, 흙장난을 하며 하루를 보냈죠. 그때의 흙은 순수하고 즐거운 기억으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흙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흙은 곧 땅이고, 땅은 재산이며, 재산은 곧 성공의 척도가 되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부동산 투자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너도나도 아 청약에 뛰어들고, 갭 투자로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옵니다. 저 역시 ‘나만 뒤처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부동산 관련 정보를 찾아보고, 투자 상담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돈을 벌고,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내 삶의 목표일까? 흙 한줌을 펴보니까 구더기로 변하는 꿈처럼, 겉으로는 번지르르해 보이는 욕망의 실체가 실은 혐오스러운 무언가로 가득 찬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는 어쩌면 흙이 가진 본질적인 가치를 잊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흙은 생명의 근원이며, 모든 것을 품어 안는 포용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농부의 땀방울이 깃든 흙은 풍요로운 수확을 가져다주고, 예술가의 손길을 거친 흙은 아름다운 작품으로 탄생합니다. 흙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존재이며, 욕망의 도구가 아닙니다.
욕망의 씨앗, 싹을 틔우기 전에
(이어서 작성 예정)
욕망의 씨앗, 싹을 틔우기 전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욕망이라는 씨앗이 혐오스러운 구더기로 변질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요? 먼저, 욕망의 근원을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욕망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혹은 사회적인 성공의 기준에 맞춰 쫓아가는 욕망은 쉽게 변질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욕망은 외부의 압력이 아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금욕은 오히려 욕망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고, 억눌렸던 욕망은 언젠가 통제 불능의 상태로 폭발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욕망을 건강하게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동산 투자에 대한 욕망이 있다면, 단순히 돈을 불리는 것에서 나아가, 주거 환경 개선에 기여하거나, 지역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시각을 전환할 수 있습니다. 작은 텃밭을 가꾸거나, 버려진 땅을 활용하여 공동체 정원을 만드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흙을 직접 만지고, 생명을 키워내는 과정에서 욕망은 건설적인 에너지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욕망의 크기를 조절하는 연습도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갈망하고,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는 불행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태도를 길러야 합니다. 명상이나 요가, 산책 등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활동을 통해 욕망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얼마 전, 집 근처 공원에서 작은 화단을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꽃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흙을 만지면서 어린 시절의 순수한 즐거움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흙은 여전히 제 손 안에서 생명을 품고 있었고, 구더기가 아닌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습니다. 욕망이라는 씨앗을 건강하게 키워내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흙 한줌에서 꿈틀거리는 구더기를 볼 것인가, 아니면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 것인가. 그 답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이제, 당신의 손 안의 흙은 어떤 모습인가요?
욕망의 정원, 스스로 일구다
욕망의 크기를 조절하는 연습은 마치 정원의 잡초를 뽑는 것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정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는 잡초들로 가득할 수 있습니다. 욕망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삶의 동기부여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끊임없는 갈망과 불만족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잡초를 뽑듯이, 불필요한 욕망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은 정원에 물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메마른 땅에는 어떤 씨앗도 싹을 틔울 수 없듯이, 감사가 메마른 마음에는 어떤 만족도 채울 수 없습니다. 오늘 마신 따뜻한 커피 한 잔,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나무 한 그루, 사랑하는 사람의 따뜻한 미소. 일상 속 작은 행복들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연습을 통해,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감사는 욕망의 크기를 줄여주고, 현재의 삶에 대한 만족도를 높여줍니다.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는 활동들은 마치 정원을 가꾸는 도구와 같습니다. 명상이나 요가는 굳어진 땅을 부드럽게 만들어주고, 산책은 정원을 둘러보며 여유를 즐길 수 있게 해줍니다. 이러한 활동들은 욕망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차분히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합니다. 정원을 가꾸듯이 꾸준히 마음을 돌보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욕망을 다스리고 조절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습니다.
집 근처 공원에서 작은 화단을 가꾸는 일은 저에게 단순한 취미 활동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꽃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흙을 만지면서, 저는 어린 시절의 순수한 즐거움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흙은 여전히 제 손 안에서 생명을 품고 있었고, 구더기가 아닌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습니다. 욕망이라는 씨앗을 건강하게 키워내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흙 한 줌에서 꿈틀거리는 구더기를 볼 것인가, 아니면 아름다운 꽃을 피워낼 것인가. 그 답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이제, 당신의 손 안의 흙은 어떤 모습인가요? 그리고 당신은 그 흙으로 어떤 정원을 만들고 싶으신가요? 당신의 욕망은 어떤 꽃을 피워낼 수 있을까요? 그 가능성은 무한하며, 그 선택은 오롯이 당신의 몫입니다. 스스로의 손으로 욕망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내 안의 정원사
당신의 정원은 어떤 모습인가요? 혹 쉴 새 없이 솟아나는 잡초에 덮여 있나요? 아니면, 작은 행복들이 옹기종기 모여 아름다운 꽃밭을 이루고 있나요? 어쩌면 아직은 황량한 벌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씨앗을 심고 물을 줄 수 있는 두 손이 있으니까요.
삶의 주인이 되는 선택
글을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욕망이라는 게 무조건 나쁜 걸까? 마치 잡초처럼 뽑아 없애야만 하는 존재일까? 물론 맹목적인 욕망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들 수 있지. 남들과 비교하며 더 많은 것을 갈망하고,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게 하니까.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욕망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힘이기도 하잖아.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다는 욕망,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욕망. 이런 긍정적인 욕망들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해.
결국 중요한 건 욕망의 크기를 조절하고, 방향을 잘 설정하는 거겠지. 마치 정원사가 정원을 가꾸듯이 말이야. 무작정 잡초만 뽑아내는 게 아니라, 필요한 식물은 잘 자라도록 돕고, 불필요한 것은 정리하는 것처럼. 우리 안의 욕망도 마찬가지 아닐까? 긍정적인 욕망은 잘 키워내고, 부정적인 욕망은 다스리면서, 균형 잡힌 삶을 만들어가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스스로 욕망의 정원을 가꾸는 방법이 아닐까 싶어. 어쩌면 우리 모두는 자기 안에 작은 정원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정원사인지도 모르겠네. 이제 우리, 각자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꿔보는 건 어때?